성경 단어 나눔

벨릭스와 베스도 (Felix and Festus)

벨릭스는 대략 AD 52년부터 60년까지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으로써 유대지방을 다스렸다. 노예출신으로 자유민의 신분을 얻은 그가 유대의 총독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글라우디오 황제와의 친분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그의 형 팔라스(Pallas)의 지원 덕분이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벨릭스는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까지 동원할 정도로 잔인한 인물이었으며, 또한 총독의 지위를 이용하여 뇌물과 여자를 탐하였던 탐욕스런 인물이었다. 벨릭스 이후 몇 년 뒤 유대를 다스렸던 알비누스(Albinus) 총독도 벨릭스가 뇌물을 받고 심지어 반란에 가담했던 죄수들까지 풀어주었다고 불평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남아있는 모든 역자자료들이 벨릭스의 부정부패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사도 바울에게도 뇌물을 기대하고 그를 계속 붙잡아 두었다는 누가의 기록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행24:26). 역사가 타키투스는 벨릭스가 '노예의 마음을 가지고 왕의 권세를 휘둘렀던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벨릭스는 낮은 출신 성분에도 불구하고 3명의 왕실 출신 아내들을 차례로 두었는데, 헤롯왕가의 자손으로 헤롯대제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이자 헤롯 아그립바 2세의 누이동생이었던 드루실라가 그 중의 한 명이었다(행24:24). 드루실라는 가문적 배경으로 인해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의 분쟁에 대해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며, 아마도 남편 벨릭스에게도 이런 내용을 자세히 알려 줄 수 있었을 것이다(행24:22). 당시의 상류사회에서 매혹적이고 발랄한 미모로 유명했던 드루실라는 수리아의 작은 왕국의 왕과 먼저 결혼했었지만, 16세가 되던 해 벨릭스의 유혹으로 남편과 이혼 한 후 벨릭스와 재혼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사도 바울은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강론하였다(행24:25).

당시 벨릭스는 '피의 대학살'을 통해 유대인들의 폭동을 진압한 사건으로 악명이 높았다. 탐욕과 폭정을 일삼던 벨릭스는 결국 잔혹한 진압 사건에 대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진정서가 로마 황제에게 전달되는 바람에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며 총독자리를 물러나 로마로 소환 당했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은 왜 벨릭스가 임기를 끝내고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도 바울을 석방하지 않았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행24:27). 벨릭스의 형 팔라스는 글라우디오 이후 네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다음에도 계속 영향력을 유지했고, 이 때문에 벨릭스는 로마로 소환된 이후에도 큰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벨릭스의 실정으로 혼란과 긴장이 감도는 유대지방에 새로 부임한 베스도는 전임 총독보다는 훨씬 지방민들에게 협조적인 인물로, 부임한지 3일만에 직접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유대 지도자들의 협조를 요청하였다(행25:1). 원만한 통치를 위해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했던 베스도는(행25:9) 비록 그 자신이 바울의 죄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지만(행25:25), 바울의 요청 때문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손에서 로마 황제의 법정으로 '뜨거운 감자'를 떠넘기고 자신의 사법적인 판결을 보류함으로써 유대인 사회와의 충돌을 조심스레 피해간다(행25:12).

여러 인물들의 복잡한 정치적 배경과 정략적 계산 속에서도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주님의 계획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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