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단어 나눔

사마리아 (Samaria)

예루살렘 북쪽 약 56 km, 지중해 동쪽 약 35km에 있는 팔레스틴 중앙산맥의 한 언덕에 위치한 지역. 비옥한 골짜기와 비탈로 둘러싸여 있어서 적으로부터 방비가 용이했기 때문에, 구약시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이 은 두 달란트에 가나안 사람 세멜에게서 이 땅을 구입, 이곳에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를 건설하였다(왕상 16:24). 사마리아는 이후 아합 왕 등 이스라엘 왕들에 의해 점점 더 확장되었으며, 특히 여로보암 2세 치하에서 최대의 번영기를 누렸으나, B.C. 722-721년 앗수르 제국의 침략으로 이스라엘 왕국과 함께 멸망당하였다(왕하 17:6).

당시 근동을 제패한 앗수르 제국은 수많은 점령국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강제집단이주 정책을 펼쳤는데, 이 결과로 그곳에 남아있던 이스라엘 민족과 타지방에서 강제로 이주해온 이방인들의 혼혈역사가 시작되었다(왕하 17:24). 사마리아로 이주해 온 이방민족들은 각각 자기 출신지역의 토속신들을 들여와 당시 사마리아 전역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으며, 여호와 하나님도 이 지방의 토속신 정도로 여기며 함께 제사를 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앗수르 제국이 세력이 약해져 있던 때, 남 왕국 유다의 요시야 왕이 펼친 대대적인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사마리아와 그 주변이 잠시 정화되기도 하였다(왕하 23:19-20). 이 후, 이 지역은 고대 근동을 점령하여 다스렸던 모든 제국들의 다스림을 받았는데, 앗수르 이후 일어난 바벨론, 페르시아 제국에 차례로 점령되었다가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헬라제국의 한 성읍이 되었으며(B.C. 322년), 오랜 혼란을 거치며 다시 로마제국에 편입되었다(B.C. 63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뿌리깊은 적대감을 생각할 때,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담대한 행동이었다. B.C 10세기 솔로몬 사후 남북왕조로 분열된 이후, B.C. 722년 앗수르 점령과 함께 이루어진 혼혈 및 종교혼합, B.C. 6세기 사마리아인에 의한 유대인의 귀환 및 성전재건 방해사건 등을 거치며 악화일로로 치닫던 관계는 급기야 B.C 4세기 사마리아의 분파가 그리심 산에 자신들을 위한 성전을 건축하고 모세 5경을 제외한 모든 구약성경을 거부하면서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인종적, 종교적으로 혼합된 분파주의적 잡종 이교도인으로 치부,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으며 심지어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은 유대인들 사이에 경멸을 나타내는 용어처럼 쓰이게 되었다(요 8:48).

혈통이나 종족, 역사적인 반감이나 알력 등 모든 장벽을 복음 안에서 허물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룰 새로운 이스라엘, 즉 '교회'를 탄생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심으로 이방을 향한 그의 계획을 차근차근 이루어 가신다. 사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예수님 일행의 단순한 통과마저도 거부하였던 사마리아인들이었기 때문에(눅 9:51-53), 만일 유대인이었던 사도들이 직접 사마리아로 들어가 복음을 전파했다면 사마리아인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며, 사도들 또한 사마리아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으로(눅 9:54-56) 사마리아의 복음화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빌립은 사마리아인들과 비슷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헬라파 유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쫓겨난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큰 반감 없이 이들의 정서에 다가설 수 있었을 것이며, 하나님은 빌립의 이러한 어려운 상황조차 사용하셔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그분의 선하신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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