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 앙 칼 럼
"예수 스타일"
 이 일 형 (KBS  대표간사)      
 
 

점진적으로 더 많은 청년들이 신앙을 외면하게 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대가 요구하는 삶이 너무 벅차서, 그들의 필요를 더 이상 충족시켜주지 못해서, 청년들의 내면적 상태가 변해서, 또는 신앙을 전달하는 도구가 잘못 되어서 등등 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지으신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청년들의 내면세계가 바뀌고, 세상이 변한다 할지라도 삶과 무관해 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수를 담고 있는 그릇/교회가 문제일 것입니다.

청년들의 내면의 세계가 변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반복되는 인류역사를 통하여 사람들의 내면세계의 변화를 이루어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와 병행하여 외적으로는 교회를 통하여 그런 변화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그릇 안에 담고 계십니다. 교회는 이 외적 사역을 감당하는 그릇으로서 하나님께서 유도하시는 내적 변화를 감지해야 하고 성령의 지시에 따라 예수를 전달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의 민감성을 상실할 때 더 이상 그릇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의 속성(죄성)은 자신의 유익을 충족 시키는데 더 급급하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첩하게 대처하지 못합니다. 그릇은 이 세상의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기에 한번 빠지면 스스로 헤어날 수 없습니다. 단체를 형성했을 때 그런 세상의 속성이 형성되기 때문에, 단체로서 성령에 민감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특히 자신이 투자한 인생의 많은 시간들이 있을 경우, 포기할 수 없는 집착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변화되는 내면의 세계를 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릇은 반복적으로 부쉈다가 다시 만들어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고, 부서져야 할 것 중 가장 핵심에는 바로 나 자신이 있습니다.

그릇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그릇의 본질인 예수를 가리게 됩니다. 복음이 선포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파하는 그 일 자체가 세상의 가치관 안으로 흡수 될 경우 예수는 사라지고 이생의 자랑이 내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이럴 때 그릇은 굳어지게 되고, 내가 혹은 교회의 위상이 예수 대신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더 이상 민감하게 대응하는 기능을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나 내 위치가, 혹은 교회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릇이 자신에게 별 유익이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변화를 시도하기 보다는 그 그릇을 포기 해 버립니다. 그릇이 변화되야 할 때 그렇지 못하면 그릇을 붙들고 있는 그 자체가 힘들어지게 됩니다. 예수의 이름이 더 이상 전달되지 않는, 즉 본질을 상실한 상태에서는, 변화의 방향성뿐만 아니라 그 방법 조차 모르기 때문에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신이 투자한 것이 많을수록 잘못된 그릇을 끝까지 붙들고 있다가 부서지는 아픔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시점에 다다르기 이전에 내게 있는 이권을 포기하고 변화의 아픔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연약한 우리들의 모습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조용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변화하고 있는 새 시대를 담으셔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그릇을 빚으시고, 새 시대를 품으십니다. 청년들이 교회를 빠져 나가는 것은 옛 그릇을 깨시기 위한 방법일 것입니다. 모두 빠져나가 더 이상 그릇을 유지할 수 없게 될 때, 그릇은 자연히 깨어지게 됩니다. 그 이전에 새 그릇을 준비하는 자들이 복된 자들입니다. 즉, 매우 힘들지만 변화를 위해 무릎 꿇는 소수의 좁은 문을 택하는 자들입니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 육신으로 계시는 동안 자신을 위한 그릇을 유기적으로 유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심으로 그릇을 형성하시고,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하며, 매 순간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성령과 같은 뜻을 품으셨기에 민감하게 동역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형식이나 방식도 없이, 그러나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목적을 향하여 묵묵히 나가셨습니다. 그의 실체는 그냥 사랑 그 자체였기에, 지나가신 곳에는 늘 사랑이 넘쳐 흘렀습니다. 그분의 인생의 목표는 십자가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궁극적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무슨 이름을 남길 것인지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분이 가지고 계셨던 것은 생명, 넘쳐 흐르는 진리, 그리고 우리에게 쏟아 부으신 사랑뿐이었습니다.

예수의 스타일은 바로 이런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 형식도 없이 무한정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 같지만, 사랑과 열정에 이끌린 삶입니다. 외적 붙들림이 아닌 내적 경건에 굳게 붙잡혀 있으며, 아무 목적없이 살아가는 사람 같이 보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 삶입니다. 이 세상에 생명을 전하고 싶어하는 심장을 가지고 십자가를 늘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주시고자 하신 생명은 단순하게 호흡을 유지시켜 주는 차원이 아닙니다. 생명 그 자체에 참 의미와 희열을 주는 본질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런 생명을 즐기는 자들의 하나됨이 바로 예수께서 보시기 원하셨던 그릇입니다.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의 스타일로 살아가는 선배들입니다. 법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사는 자들입니다. 청년들이 보고 흉내낼 수 있는 세상에서는 바보스러운, 그러나 한없이 멋있는, 그런 모델들입니다. 이 세상에 목말라하는 많은 젊은 사마리아 여인들과 남성들을 충분히 품을 수 있는 넘치는 그릇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