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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스타일
 문상호 (sKBS 성균관대)      
 
 

저는 대학에서 행정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을 교육하면서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교직생활을 하셨을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그리고, 교육자로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신 핵심적인 교육내용은 ‘영원한 생명’의 의미와 방법이 아니었나 마음 속으로 정리해 봅니다.

갈릴리로 향하는 여행 중에 들르신 수가성에서 만난 물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생수(living water)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인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 물이 먹는 우물물인 줄 알고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그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고 하시면서 주시려는 물이 여인이 구한 ‘우물물’이 아닌 ‘영원한 생수’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요즘 학생들은 ‘떡을 먹고 배부르는’ 일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모릅니다. 세계적인 불황 탓인지 ‘무얼 먹을까 무얼 입을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쉬운 이 세대의 모습이겠지요.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 것을 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문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생을 얻는 일에 장애가 되어 온듯 합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고 권면하신 예수님을 보면 이 문제(‘썩는 양식’ vs. ‘영생의 양식’)가 신앙생활에서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사건의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한 후 ‘육의 양식’을 구하던 무리는 예수님을 잡아 ‘임금 삼으려’ 하였습니다(요 6:15). 요즈음 용어로 표현하면 차세대 ‘경제 대통령’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썩는 양식’을 해결하고자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그곳에 모인 무리에게 ‘영생의 양식’을 주시는데 있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꾸짖으시는 예수님께 실망한 무리가 예수님을 떠나자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도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물으신 문제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 영생의 말씀을 전하러 오신 예수님!

이 세대는 신자유주의로 말미암는 글로벌 경쟁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캠퍼스의 학생들은 지식과 기술을 의지하여 경쟁의 시대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한 생존경쟁으로 지친 이 세대에게 예수님은 역설적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 이어서 주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십니다;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요 6:27)”, “나는 하늘로서 내려 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요 6:51)”,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4-55)”

디베랴 바닷가에서 오천명의 무리가 구한 일용한 양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 비교할 수 없이 더 귀중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영생’이라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진정으로 주시기 원하신 것은 육의 양식이 아니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영생은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자’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believe), 그분을 신뢰하고(trust), 그분과 연합하는(unite)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요 6:54)”고 하신 예수님의 언명대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생명은 진실로 ‘영원한(eternal)’, 그리고 ‘신적인(divine)’ 생명인 것을 믿습니다.

구주 예수를 인생 가운데 영접한 지 23년째가 되어갑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수가성에서 그리고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과 ‘영생(永生)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그리고 ‘영생(永生)하도록 있는 양식’이 제 자신이 날마다 구주께 구할 ‘생수’요 ‘양식’임이 분명해져 갑니다. 육신이 쇠하고, 풀의 꽃과 같이 인생의 영화가 다 지나갈 때, 영원한 생명되신 예수께 연합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이 “예수님 스타일(Jesus Style)”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