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흔적 - 김지은 (GWU3)


대학이라는 곳에 와서 세 번째 학기를 보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곳에 오게 된것, 올 수 있었던 것, 공부를 하도록 허락해주신 것, 지혜를 주신 것, 능력을 주신 것. 이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가능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별히 더욱 감사한 것은 저에게 꼭 필요했던 "주권의 회복"이라는 주제로 한 학기 동안의 성경공부를 통해 고민하게 하시고, 고쳐나가게 하시고, 항복하게 하시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예수님께서 저의 주인이심을, 제 삶 속에서 드러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제가 교만하면, "내가 네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주권의 회복"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늘 "괴롭다"는 표현만 입 밖으로 흘러나왔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저를 실수 투성이인 연약한 존재로 만드셔서 늘 괴롭게 하십니까?" 그런데 이렇게 한 학기 동안 "주권의 회복"을 간절히 소망함에, 괴로워만 하다가 얼마 전에 늦게 서야 괴로움의 이유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저의 삶에서 주권의 회복이 일어난 부분이라면 시간 사용입니다. 저는 '나만큼 게으른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을정도로 시간을 낭비하며 살았습니다. 여기서 또한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권희 회복을 위한 여건을 이미 마련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처음 방짝을 만났을 때 감사했습니다. 방짝이 수영 선수이기 때문에 아침 7시에 연습을 가면 저는 그시간에 하나님께 큐티와 기도의 시간을 드릴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서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저의 "우상"이었던 인터넷 사용도 아예 주시지 않음으로, 많은 시간을 "우상"에게 낭비하는 것 대신 하나님께 드릴수 있는 시간이 늘게 되었습니다. 저의 힘으로나 의지로나 시작부터 불가능할뻔했던 것을 이미 계획해주시고 그렇게 할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런데 괴로웠던 것은, 그렇게 순종만 했으면 될 것을 저의 마음데로 제가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은 하나님께 드려도 내 삶은 내가 주권자다'라는 교만한 생각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괴로웠습니다. 사실이 그러하지 않기에, 제가 제 삶의 주권자가 아니기에 괴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괴로움의 회복으로 주권의 회복을 이뤄나가셨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립보서 2:3>


교만의 뿌리를 뽑아야만 다른 부분의 주권의 회복이 일어날 수 있을것이라는 신념에 겸손해지고 싶고, 그래야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주권의 회복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겸손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이번 학기 첫 기도제목, 겸손해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제와 관련이 있어서가 아닌, 그냥 막역한 기도제목 이었는데, 그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겸손의 '방법'은 빌립보서에 아주 잘 나와있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2:5-8>.


종의 형체라는 표현이 매우 도전적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제가 종의 형체라는 단어를 마음속에 '인식'시켰을 즈음 매일 떠오르는 단어는 '항복', 그리고 '무식'이었습니다. '무식하게 항복하고, 무식하게 앞만 보고, 무식하게 겸손하고, 무식하게 담대해야겠다'는 저의 다짐겸 소망이 생기게되었습니다. "그래, 종은 무식하게 주인이 시키는 데로 일하고, '왜' 라는 반항적 질문도 하지 않는다. 무식하게 살자." 라는 다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좀처럼 겸손은커녕 항복도 못하고 계속 힘들어만 하게되었습니다. 에스겔서 큐티를 할 때마다 "가증스럼움"' "가식적임" 이러한 표현들이 모두 저를 가리키는 것 같았습니다. 매일매일 괴로움이 더해갔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항복해버렸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무식하겠습니다. 이제 제 삶의 열쇠를 기꺼이 넘겨 드립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난 뒤 참 부끄러웠습니다. 자신의 머리만 숨기고는 다 숨은양 좋아하는 타조의 모습이 저의 모습과 다를바 없었습니다. 쓸데없는 일에 자기정당화, 자기 합리화를 시키는것도 지치게 되며 소용없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정확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저의 생각과 계획을 아시기에, 어떻게 저에게 일어나는일 하나하나를 사용하셔서 저를 깨워주실지 철저하게 계획하고 계신 듯 했습니다. '참겸손'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마음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한 소망가운데 아주 뼈져린 계기를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아주 조금이나마 느끼게 하여 주셨습니다.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계 제 삶의 열쇠를 드리고 난 뒤 저에 게 벌어지는 일들이 주체할수 없고 감당할수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지금 이제 막 시작인데 이렇게 어렵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정말 힘든데.." 그때에 다시한번 "무식"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이왕 가는거 철저하게 무식해야겠구나, 무식하게 앞만보자, 푯대만.."거의 배짱이 생겼습니다..아마도 이것이 믿음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양심의 찔림으로 인한 괴로움에 주권을 회복시키시고, 주권의 회복뒤에 주시는 단순무식한 담대함, 그리고 그로인한 믿음,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라디아서6장 1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