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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글
손호준님은 University of Virginia에서 캠퍼스 간사로 섬기고 계십니다.
대학 때 섬기던 공동체에서 여름 수양회 대신 지역 전도를 나갔던 적이 있었다. 양적인 면에서 가장 복음화율이 낮은 지역으로 400여명의 공동체 멤버 전체가 가서 낮에는 팀별로 도시 곳곳에 흩어져서, 밤에는 다 같이 모여서 집회를 통해 복음을 전했다. 대부분 목이 쉴 만큼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았고, 그렇게 5일동안 밥만 먹고 복음을 전한 서로에 대해 참 자랑스럽게 여겼다. 마지막날 서울로 돌아오기 전 잠시 해운대 바닷가를 들러서 몇 시간을 놀았는데, 그 때 나의 팀 멤버들 모두가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했다. "예수님도 물 위를 걸으셨으니, 우리도 걷는 거야!" 외치면서 모두가 일렬로 손잡고 일제히 바다로 뛰어들어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재미를 위한 장난이었다. 왜냐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이라는 심각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면서 문득 이 추억이 생각난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이렇게 "물 위를 걸으려는 것 (대단한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것)" 으로 쉽게 표현되는 것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심각하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이런 식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란 말을 접했을 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라면 아마도 "부담감" 일 것이다. 위장된 이미지와 주변의 시선 너머 솔직한 자신의 자아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수준, 혹은 성경에 나온 기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는 것을 매일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주를 믿고 신앙생활을 한 지 오래되면 될수록 그 "차이" 는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크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비록 그 "부담감" 의 정도는 다를지라도,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동기부여" 는 아마도 예수를 믿고 나면 당연히 가지게 될 소망이기에, 그 "부담" 을 안고서 좀더 그렇게 살아보려는 몸부림을 치게 된다. 이런 나의 몸부림이 근거가 되어서 "상대적" 으로 그럼 몸부림이 적어 보이는 이들을 향한 판단과 정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 사람을) 무려 490 번이나 용서해 주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고작 7번도 누군가를 용서하기 힘든 솔직한 내 모습을 아는 이들에겐 정말 큰 부담일 수 밖에 없다. 그 부담을 가지고서 "490번은 안 되도, 열심히 용서하려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저 수준이 되겠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절망하게 된다. 어떻게 내게 죄를 지은 한 사람을 무려 490번이나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아무리 몸부림친다 해도 평생 이 수준엔 못 이를 거 같다. 몸부림은 치겠지만, 여전한 "부담" 은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기쁨" 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 것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이렇게 스스로가 작게만 느껴지는 "겸손한"(?) 마음과는 대조적으로 고린도전서나 다른 신약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일종의 "분노" 가 느끼면서 앞서 말한 "판단과 정죄" 의 마음을 넘어서는 또 다른 차원의 이슈에 직면한다. 아무리 바울이라도 나와 다를 바 없는 인간에 불과한데, 어찌 "나를 본받으라!" 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을 핍박하는 데에 열심이 넘쳤던 사람이지 않은가! (적어도 내겐 이런 유의 "열심" 은 없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런데 어떻게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또 도대체 무엇을 본받으란 말인가? "나를 본받으라"고 하는 것에 결혼도 안 하고 정처없이 돌아다니면서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한 바울의 삶을 그대로 집어넣어서 그럴 의향이 있는지 모임의 지체들에게 도전(?)해 봤더니 다들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그러면서 그들의 마음 속에 스며드는 "부담감" 을 금새 읽을 수 있었기에, 묵상하면서 생각했던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고 한 말씀의 참된 의미를 말해주었다.

바울이 힘들고 하기도 싫은데 억지로, 혹은 사명감에 불타는 마음 만으로 그렇게 살아드렸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그가 "너희도 나처럼 고생 좀 해 봐라!" 는 심정으로 "나를 본받으라" 고 말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가정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당당함"과 "기쁨"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열심" 과 우리로써는 도저히 흉내내기에도 힘든 수준의 "헌신" 과 "능력" 이 바울의 모습과 고백 속에, 한 두번이 아니라 전 생애게 걸쳐서 일관되게 (consistently) 발견되기 때문이다. 한 두 번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평생을 한결같이 달려가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한 두번 용서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490번 하는 것은 우리의 열심이나 결단이나 노력을 초월하고 만다. 오히려 바울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또 다른 차원에서의 "부담감"을 느꼈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이런 삶으로 평생 달려가도록 동기부여를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그렇다면, 그런 삶을 기꺼이 살아드리고자 하는 바울의 정신과, 그런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던 본질을, 바울의 인생 전체와 본문의 흐름들을 함께 살펴보는 통찰력을 가지고서 살펴보아야 한다.

묵상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바울이 우리를 향해 "나를 본받으라"는 것은 그의 구체적인 모습이나 상태, 행동 혹은 열심 그 자체만을 보는 그대로 본받으라고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전부 결혼을 해서는 안 되며, 한 곳에 정착해서도 안 될 것이고, 전부 자비량으로 돈 벌면서 풀타임 사역자로 나서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삶을 모두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이런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고유한 "부르심" 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신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 부르심에 그저 "반응" 한 것 뿐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하는 것의 바탕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고전11:1 )" 는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았다. '그리스도를 본받았으면 좋겠다'하는 바램이나 선언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성도된 고린도 교회와 우리들을 향해 감히 "나를 본받으라" 고 당당히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그의 삶을 우리보고 본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이 주를 본받기 위해 노력한 의지적인 측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그 노력은 그의 존재 (Being)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던 본질에 지속적으로 집중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는 바울이 일관되게 자랑하고 있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롬1:16 을 기억해 보라!). 모든 유익한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잃어버리더라도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그것이야말로 바울을 죽기까지 달려가게 한 원동력이다 (빌3:6~14). 그를 그토록 달려가게 했던 본질을 향한 노력이야말로 바울같은 전혀 다른 차원의 헌신과 섬김과 희생과 순종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갈6:14 ) But may it never be that I should boast, except in the cross of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ich the world has been crucified to me, and I to the world. (Gal 6:14 )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고전15:31 ) I protest, brethren, by the boasting in you, which I have in Christ Jesus our Lord, I die daily. (1Co15:31 )

바울은 날마다 자신의 "죽음" 을 십자가에서 경험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에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였고, 매일 육체에 거하는 삶 역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 (갈2:20)"임을 고백하였다. 아무리 선한 척 하고 (놀랍게도, 바울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바리새인이었다! 선한 척 한 정도가 아니다! 빌3:5), 열심을 품고 섬기며, 여러 섬김의 활동들을 왕성하게 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살아있는 옛 자아는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경험을 했다. 죄 (죄인) 를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진노 앞에서 그의 자신의 쌓아온 명성, 열심, 배경, 노력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그는 이런 "죄책" 에서 자유하기는 커녕, 점점 주를 좇는 삶을 배우고 경험하며 전할수록, 십자가는 더욱 선명하게 자신의 죽음을 날마다 선포하고 있었다. 여전히 세상에 속해서 세상의 방식대로 판단하며, 세상이 추구하는 썩어질 것들을 향해 달려가고,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자아를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죽이시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여야만 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통해, 바울의 내면을 지배해 왔던 "세상 자랑과 사랑" 이 예리한 칼로 도려내듯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처절한 고통을 날마다 경험해야만 했다. 내가 죽기 위해 십자가에 올라가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옛 자아를 죽이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바울의 고백이다. 죄를 안 지은 척 하거나, 사람들이 인정하는 선한 일들로, 불같은 나의 열심으로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주께서 흘리신 보혈만이 나를 완전히 새롭게 함을 날마다 십자가에서 자신이 못박혀 있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의지적으로 기억하고 붙들었던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주로 고백한 다음부터 날마다 죽었다.


둘째로, 십자가에서 바울이 날마다 경험했던 것은 자신을 향하신 한이 없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하나님의 진노를 다 감당한다 해도 해결될 수 없는 죄 가운데 여전히 있는 나. 그런데 이런 나를 위해 대신 값을 치르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볼 때마다 그 분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날마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내가 그 분께 무엇이길래 나를 나보다도 더 사랑하시는지 잘 납득이 안 되는 것이고, 또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내가 지불하고 행동할 여지를 조금도 남겨두지 않으시고 완전히 공짜로 (priceless: 이 세상의 그 어떤 가치로도 독생자의 보혈의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하기 때문에 priceless 이다!) 내게 주셨다는 것이 놀랍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독생하신 하나님을 날마다 의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나를 향한 하나님의 물밀듯한 사랑을 날마다 누리게 된다. 그 사랑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신 "기쁨" 이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경험하는 것은 영혼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타는 듯한 사랑이다. 십자가는 분명 나를 위한 하나님의 최고의 선택이시지만, 또한 나와 동일하게 죄인인 이들을 향한 타는 듯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절절히 담겨져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타는 듯한 마음을 외면하고, 여전히 죄와 사망의 낭떠러지로 달려가고 있는 영혼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과 나와 같이 예수믿고 구원받아 한 "형제" 된 이들이 십자가 때문에 그렇게 귀하게 여겨지는 마음이다. 멸망으로 달려가는 이들이 살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엔 없기 때문에 (행4:12), 목이 터져라 "예수 구원" 을 외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예수님 때문에 한 지체가 된 이들이, 아무리 나와 다르고 불편하더라도 그 역시 하나님이 나만큼 사랑하셔서 아들 죽이신 존귀한 자이기에, 사랑하고 용납하며 섬길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십자가 앞에서 빚진 자의 마음이 오늘 바울이 갖고 있는 마음이고 우리가 닮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십자가의 사랑은 해일 (overflowing) 과도 같아서, 우리를 그저 옆의 사람들에게 나쁜 일을 않하고 nice 하게 대하는 수준을 뛰어넘어서 결국에는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요일3:16)" 수준까지 우리를 몰아가고 만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소위 "올인" 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에 빚진 우리로서는 지체를 위해 "올인" 하는 것이 당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신 또 다른 "기쁨"이다.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하는 것은 다분히 의지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십자가에 내가 달리려는 노력이 아니라,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서 자신의 죽음과 나를 향한 사랑, 그리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인정하고 기억하며 되새기는 노력으로 이해해야 한다. 요즘들어 부쩍 부모님에게서 종종 "내가 널 키운 대로 나중에 다 갚아라" 고 하시는 말씀을 자주 듣는다. 정말 내가 부모님이 날 위해 쏟아부으신 것들을 전부 환산해서 물질이나 다른 것으로 그대로 되갚기를 원하실까? 아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아직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수도 없을 뿐더러, 그걸 원하셔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철이 들고서 깨닫게 되었다. 부모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넌 내게 세상 그 어떤 것 보다도 소중한, 내 생명보다도 더 귀한 내 사랑하는 아들이야. 내가 널 그렇게 사랑했고, 지금도 변함없이 그렇게 사랑하고 있어" 라는 것을 "알고" "기억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명령은 "내(하나님)가 널 그렇게 사랑한단다" 라는 것을 "알라" 는 것이고, 그 사랑에 대한 "반응" 은 똑같은 사랑인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으로 반드시 표현된다. 지체들을 사랑하는데, 내 수준이나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거울처럼 반사되어 그대로 옆의 지체들을 구체적으로, 생명을 다해 사랑하도록 한다. 이 거울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십자가를 매일 매일 직접 경험할 때에,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 반사되어 지체들을 향한 사랑으로 비춰진다. 더 나아가 우리도 바울처럼 "나를 본받으라!"는 도전을 감히 하게 된다. 십자가가 유일한 답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3:16 ) We know love by this, that He laid down His life for us; and we ought to lay down our lives for the brethren. (1Jn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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