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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
 
박재성
박재성님은 KBS 조지타운 대학교 모임에서 코디로 섬겨주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실까? 어떠한 분이시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분을 따르고자 하고 본 받고자 하는 것일까? 그 분의 삶의 모습은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어떠한 것이 달랐을까? 그리스도인 또는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많은 이들이 이러한 생각을 합니다.

저 또한 그리스도를 알아가기까지 많은 시간이 들었었고, 또 많은 경험들을 하는 가운데 변해가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전의 제 모습이 그리스도의 모습과 얼마나 많이 달랐었나를 깨달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부족함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와 세상적인 삶이 어떻게 다른 지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이전에 전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비록 엄청나게 돈이 많거나 큰 권력을 쥐거나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스스로가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자신이 있었고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 잘 관리해가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제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남에게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성공에 대한 엄청나게 큰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 성공적인 삶을 위해 정말 철저히 자신을 관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몇 년의 계획을 미리 세우고 일 년 단위 월 단위 계획을 세워 내가 나아가기 위한 목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습니다. 남보다 뛰어난 나만의 경쟁력을 키워가기 위해 남들보다 두 세배 노력했습니다. 몇 개 외국어에 도전을 하고, 여러 개의 기사 자격증 취득, 학점 관리 뿐만 아니라 각종 모임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나의 삶을 내가 멋있게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모습들 속에는 항상 성취욕이 있었기에 일정 수준의 가시적인 효과가 드러나야 만족을 했고 내가 기대한 정도의 성취를 이루고 나면 곧 또 다른 도전할 목표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행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쁨을 찾고자 하였고 나의 마음이 편한 것이 육신의 고달픔 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도와주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의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라도, 기뻐하기 위해서라도 적극 나서 도와주었고, 힘들어 하는 친구들을 위해 각종 이벤트를 만들며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함에 따른 일종의 만족감을 즐기고 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 친구들에게 잘 대해 주다 보면 그 친구들도 나를 좋아하게 되고 때로는 적당히 왕자 병 기질을 발휘하며 여러 사람 가운데 있는 나의 모습을 즐긴 것 같습니다.

그러한 삶의 모습 속에 가장 심각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자랑과 교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하였더라도 끝에 가서 남는 건 결국 자랑거리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의 모습에 너무 익숙해 내가 항상 최고의 자리에 있다고 착각을 했습니다. 나름대로는 나에게 주어진 삶을 보다 값지게 멋지게 폼 나게 살아보겠다는 젊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겠지만 거기에는 내가 중심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마저도 나의 의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습니다. 군중 속에서 항상 관심의 중심에 서있는 정치인과 비슷한 건 아니었나 모르겠습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 가식으로 대한 적은 절대 없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대인관계가 이루어지는 가운데서도 내가 손해를 보며 무언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좋은 평을 듣게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면 손해를 보는 건 아니었습니다.

KBS (Korean Bible Study, 한국어 성경 공부 모임)를 통해 그리스도에 대해 서서히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나와 참 많이 다른 모습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더라도 그렇게 정말 행한다는 것이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 했습니다. 그 때는 예수를 사람으로 이해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라는 것을 안 건 나중이었고 그제야 좀 더 그리스도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와 성공을 위해 내려오시지를 않았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성공 지향적으로 살아가고자 한다고 여겨지는 이 시점에서 2000년 전의 예수님은 참 다른 분이라 여겨졌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 있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그것도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 불편한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습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영혼의 구원이 목표였기에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며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자신이 제물로 드려지며 그 피로 이 땅의 우리 인간들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정말 흠 하나 없고 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극악의 형벌과 함께 죽음을 경험한 후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다시 부활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나와 같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견된 수많은 고난을 감수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라고 하시는 예수님이 말 구유에서 태어나셔서 자라서는 목수의 삶을 살고 3년의 공생의 삶을 시작하셔서는 세상에서 가장 천대 받는 직업을 가진 이들을 제자로 삼으셔서 떠돌이 생활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머리를 누일 곳도 없다고 하셨을 정도로 이 세상 속에 어떠한 재산을 축적하거나 편하게 안주하지 않으셨고, 서로 좋은 말을 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좇은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전념하시고 자신의 기득권을 위협 받고 있는 유대인들에게서 수 없는 박해를 받습니다.

또 하나 나와 같은 사람과 가장 구별되는 예수님의 모습은 겸손이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6-8)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자랑을 하려고 기회를 찾고 그 교만함이 맘 속에 가득합니다. 많은 일들을 함에 있어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조금의 노력으로 큰 명성을 얻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순종했다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오로지 하나님의 의가 드러날 수 있도록 행하는 그 모습은 진정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하여야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이전 나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죄로 인해 뒤틀어져 있는 세상 속에서 참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헤매이고 있는 수많은 영혼을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보고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아담과 하와의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되게 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이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세상적인 삶의 모습과 다른 면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후 그럼 어떻게 그러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으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 인이라면 당연히 그 구원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이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주일에 교회를 가고 자신과 가정의 안위를 위해 기도를 하고 축복을 구하는 모습으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 인이라면 자신의 구원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예수님은 이 세상 가장 중대한 지상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사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19-20)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음까지 이르는 고난을 감수하셨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손수 이 땅에 내려와 그 고통을 당하셨는데 나는 이 세상 속의 행복함과 즐거움만을 좇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그 고난을 감수하셨는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나 또한 그 고난에 동참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에 안주하며 이 전의 쾌락과 즐거움만을 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 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빌립보서 3:10-11)

이제 자랑을 일삼던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가야 하겠습니까? 겸손의 모습을 보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아 순종하는 삶을 행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나의 노력으로 이 세상에서 일들을 행해가고 그 보잘 것 없는 몇 가지에 내가 최고인 양 자랑할 것이 아니라, 만유의 왕이신 주님을 삶 속에 의지하며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나를 내가 스스로 높이려고 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은 나의 삶 전체를 통하여 엄청난 일들을 행하십니다. 내가 행하는 일들 하나 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질 수 있고, 성령님의 주관하심 아래 온전히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 이어질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본 받고자 하는 삶의 노력과 모습 속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에 대한 확신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실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품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형식적인 교회 생활, 사회 생활의 터로 교회를 생각한다면 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진정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는 것,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 인들이 예수님을 본받고 따를 수 있도록 하는 근간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였던 내게 주님께서는 먼저 손을 내밀어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의 의미도 조금씩 알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향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내 삶 모두를 주님께 드린다고 고백도 하지만 아직도 나의 삶 속에는 이전의 많은 모습들이 남아있습니다. 하루에도 주님을 열 번도 넘게 외치고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려 하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의 삶 속에 드러나지 않을 때마다 나의 모습에 많은 한계를 느낍니다. 아침에 기쁨으로 기도를 하고 시작하다가도 저녁이면 내가 잘못한 말의 실수와 행동의 잘못들이 또 드러나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길을 나는 가렵니다. 비록 아직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내 삶 속에 다 실현내지 못한다 하더라고 이 길이 참 진리임을 알기에 가렵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수 많은 눈물을 대신 쏟으셨을 주님의 그 사랑을 알기에 나는 가렵니다. 비록 내가 이 땅에서 보잘 것 없이 지더라도 나에게 주님만 함께 하신다면 나는 그 길을 가렵니다. 죽는 그 날까지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따라가렵니다. 그 분이 내 진정한 삶의 구원자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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