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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예수님을 본받아
양면성의 원칙 (The Principle of Duality)
 
이일형 권사님
이일형님은 KBS대표 간사로 현재 베트남에서 근무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고립된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

원래 창조된 구조 때문에 현재 영과 육이 분리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모든“본질”의 문제는 육의 세상과 영의 세상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 자신도 원래의 창조의 틀에 의하여 규명되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본질도 아직은 영과 육의 혼합체이다. 다만 영으로 죽었기 때문에 고립된 육의 세상만 의식하고 살아갈 뿐이다.

예수님의 오심을 우리는“성육신”이라고 한다. 성육신은 우리 가운데 지속되는 현실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육신은 예수님의 성육신처럼 말씀과 성령님의 두 가지 모습으로 다가와 계신다. 이 둘이 하나로 우리 안에서 합쳐지게 될 때, 성육신, 즉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게 되시는 것이다. 이 원칙은 하나님의 창조가운데 이미 내재 되어 있기에 성육신도 이 방법으로 이루어 지는것이다. 더 나아가 모든 본질의 문제가 이 원칙에 순응하며 이를 우리는 양면성의 원칙 또는 The Principle of Duality 라고 이름 지어 본다.

오순절 사건에서 보여 주듯이 제자들의 삶 가운데 이 성육신이 시작될 때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이 “말씀의 터져나옴”이다. 이 순간이 바로 육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으로 변화되는 순간이고, 생명을 지닌 말씀을 우리는“로고스”라고도 한다. 이 생명의 말씀은 영과 육의 세계의 양면성을 초월해 존재하신다. 흙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을 만드셨던 하나님의 섭리가 다시 흙으로 되어버린 부패 된 생령에 또 한번의 생기를 불어넣게 된다. 즉 성령님이 임하시게 된 것이다. 고린도 전서의 말씀을 인용한다면 로고스는 육의 존재와 아직 외형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영적 존재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 안에 거하시며 역사하신다 (고린도전서 15:44).

이 양면성의 원칙에 대하여 조금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첫째로, 영의 사람은 육의 사람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영의 생명이 있을 경우 항상 육의 삶에서도 표현되게 되어 있다. 그것을 성경은“그 열매를 보고 안다”라는 표현을 쓴다 (누가복음6:44). 그 열매는 로고스에서 표현된 “레마”의 말씀의 능력이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과도 동일한 개념 이다 (야고보서2:26).

둘째로, 영의 사람이 주체가 되어야 영원한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주체가 육의 사람으로 옮겨지는 순간 영의 사람은 가려지게 된다.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모든 본질의 문제의 결정은 영의 사람의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결정”은 이렇게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의지에 의하여 이뤄진다. 로고스는 우리들의 의지를 충분히 움직여 주시며 육체의 사람의 요구를 견제해 주신다. 다만 온전한 선택에 의한 결정을 가능케 하시기 위하여 온전한 선택을 할 수 있을 만큼만 우리의 의지를 도와 주신다 (로마서 8:2-6).

셋째로, 올바른 의지적 결단 이외에 우리가 영적 세계에 대하여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다. 이는 로고스에 의하여 지배 받는 결단은 이미 영의 세계와도 일치되는 원리들 안에서 이루어 지기 때문이다. 다만 의지적 결단의 주체는 성육신으로 로고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누가복음 10:20).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는 어느 정도의 권한이 육의 세상에 있는 우리들에게 이양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세우신 자들에게는 미리 허락하신 즉 “pre-authorized” 된 권한이 주어진다(마가복음 16:19). 이는 바로 동역의 원칙 “The Principle of Partnership”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넷째로, 이런 권한이 주어진 자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것은 당연하나 그 그릇 자체를 의지하는 순간 그것은 육의 그릇 즉, 우상이 된다. 이는 우리가 이 보화를 질그릇에 담고 있는 것은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고린도후서4:7). 즉 로고스의 이끄심에 순종하기 위하여 만든 그릇 - 육의 세상에 표현된 단체나 교회와 같은-에 의지하게 될 때 그것은 또 하나의 종교로 전락하게 된다는 뚯이다 (예레미야 2:13).

양면성의 속성들을 생각해 볼 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로고스의 지배하게 계속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 지배하에 있기 위하여 우리의 의지적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단은 행동으로 옮기기 이전에 일어나는 단계이며 이 결단이 있은후 로고스의 능력을 통하여 행동이 가능해진다. 결단이 행동으로 표현될때 이 세상에 만들어지게 되는 그릇은 필요한 것이나,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에서 그 그릇으로 옮겨질 때 그 그릇은 영의 세상과 관계없는 육의 세상의 그릇이 된다.

예수님의 성육신도 이 세상에 육신으로 계실 때 지속적으로 매 순간 순간 재확인 되어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방해하려고 했던 구체적 사건들을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볼 수 있다. 광야에서의 40일 시험 중 굶주림 가운데 부귀와 영화에 대한 유혹, 베드로의 의도하지 않은 유혹,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역의 유혹 등이다. 마지막 십자가 상에서도 내려 오라는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은 결국 영의 세계의 실체 앞에서 계셨기때문에 육의 세계의 잠시 잠깐의 거짓된 유혹에 현혹되지 않으셨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마저도 그를 죽이지 못하고 부활하시게 된 것이다. 즉 성육신의 지속성은 의지적 결단으로 이뤄지는 순종이 있는 한 계속될 뿐만 아니라 무서운 힘으로 그 순종을 뒷받침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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